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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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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남송(1127~1271)의 유학자(儒學者), 성리학(性理學)의 집대성자(集大成者)로 주자학의 창시자. 북송(北宋) 주돈이, 소옹, 장재, 정호, 정이, 등의 학설을 계승 종합하고, 동시대의 불교(佛敎), 도교(道敎) 이론까지 섭렵해 방대한 사상체계를 창시(創始)했다. 본관은 신안(新安), 부친은 주 송(朱 松)으로 이 동(李 侗)과 함께 나종언(羅從彦)에게서 수학했으며 사훈이부랑(司勳吏部郞)이라는 벼슬을 지냈다. 아버지는 우계현으로 좌천되었다가 주희를 낳았다. 주희의 나이 8세 때 다시 관직에 나아가 남송의 수도 항주(杭州)에 갔었으나 11세 때 아버지가 다시 金나라와 화의를 반대하다가 복건성으로 돌아 왔다. 아버지 朱 松은 대금항전론자(對金抗戰論者)로 주희 역시 유년 시절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14세 때 아버지가 타계하자 아버지의 친구인 유자우(劉子羽)의 도움으로 복건성 북부 숭안현(崇安縣)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하게 되었는데 가세는 그리 풍족한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선생은 아버지의 유명(遺命)에 따라 호헌(胡憲), 유면지(劉勉之), 유자휘(劉子翬) 세 사람을 스승으로 하여 학업에 열중했는데 특히 유면지는 선생을 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당시 선생의 수학한 내용은 유교적(儒敎的) 교양을 쌓기 위한 경전의 습득에서부터 선(禪), 노장사상(老莊思想), 문학, 초사(楚辭), 병법(兵法) 등 여러 분야다. 이때 스승이었던 세 사람은 대게 묵조선(默照禪)을 경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이 남긴 10代의 詩를 살펴보면 그 역시 묵조선의 취향을 강하게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세에 과거에 합격하고 24세 때 천주(泉州)의 동안현주부(同安縣主簿)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갔는데 관리로서 모범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이때 부임하는 도중 이 동(李 侗:‘이 통’으로 발음 함)을 만나게 되었으며 그것을 계기로 그 후 10년간에 걸친 사사(師事)가 시작되었다. 이동은 양시(楊時)에서 나종언(羅從彦)으로 이어지는 도남학파(道南學派)의 적전(嫡傳)계승한 인물로 나종언에게 수학함으로서 선생은 비로소 낙학(洛學)의 정통을 이어받고 선학(禪學)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평가하게 된다.

선생은 1162년 효종이 즉위하자 봉사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첫째 도교와 불교(佛敎)를 배척하고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 의한 제왕학(帝王學)을 강습할 것, 둘째는 한(漢)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금(金)과 화의를 배척하며 내치를 닦아 이적(夷狄)을 물리칠 것, 셋째 조정에 바른 기강을 세우고 천자의 사은(私恩)에 의한 관리 임용을 배척하며 공론(公論)에 의한 정당한 군신(君臣)관계를 수립할 것 등이다.

효종의 통치 시기(1162-1189년)는 남송의 극성기(極盛期)로서 이점 주목하는 학자들은 주자학을 정치적으로 안정된 시기에 나타날 수 있는 사상으로 파악하며 무리한 북방정책보다는 우선 내치(內治)를 닦는 태도를 취했다.

1163년 이 동(李 侗)이 죽었는데 스스로의 회상에 따르면 선생은 이동이 죽을 때까지 이 동(李 侗) 학설의 종지인 미발기상체인설(未發氣象體認說)의 궁극처를 체험하지 못했다고 한다.

호굉(湖宏)학문의 호남학파(湖南學派) 적전(嫡傳)을 계승한 장식(張栻)과 교류를 시작했는데 이는 이동(李侗)학설에 대한 자기반성과 함께 그의 수양론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40세에 때 채원정(蔡元定)과의 문답을 계기로 정이(程頤)의 함양에 경(敬)을 사용하고 진학(進學)은 치지(致知)에 있다는 견해에 따라 이 동(李 侗)과 장 식(張 栻)의 학설을 종합 지향하게 되었고 비로소 그의 독자적인 이발미발설(已發未發說:인간의 정신 심리. 곧 심의(心意)가발동한 상태(已發) 발동하지 않은 상태(未發)를 정립할 수 있었다. 본설은 심(心)의 활동을 이발(已發)과 미발(未發) 두 단계로 나누어 각각에 알맞은 수양공부를 확립함과 동시에 성(性)을 미발(未發)에 정(情)을 이발(已發)에 분속시켜 인간의 내면 구조를 이해하는 이론으로서 그의 심성론(心性論)의 대강을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인데 그는 주경(主敬)으로 그 근본을 세우고 궁리(窮理)로 그 지(知)에 나아간다.❮주자전서(朱子全書)❯권(卷)75에 이발시(已發時)의 주된 공부를 치지(致知)로 설정함으로써 주자학(朱子學)의 격물치지(格物致知說)을 전개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朱子學의 형이상학(形而上學) 혹은 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는 태극론(太極論) 역시 이발미발설을 통해 제시된 인간의 본성(本性)의 진실무망(眞實無妄)함과 그 심리활동의 궁극적 근거를 탐색하면서 형성된 것이었다. 이발미발설이 정립된 1169(39세)부터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이 완성된 1173(43세)까지의 4년간은 선생의 생애를 통해 가장 논변이 많았던 시기였다. ❰이발미발설(已發未發說)❱,❰정자양관설❱,❰중용수장설(中庸首章說)❱,❰악기동정설(樂記動靜說)❱,❰원형이정설(元亨利貞說)❱등 4년간은 대다수의 논문을 이 시기라 할 수 있다. 仁義禮智와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를 각각 性과 情에 분속시키고 인의예지와 원형이정(元亨利貞)을 대응시켜 인간의 성정(性情)을 천지의 성정과 일치시킨 ❰仁說❱(43세)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이학(理學)의 체계 속에 편입시킨❰태극해이(太極解義)❱,❰태극도해(太極圖解)❱와❰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를 합친 것(44세)이다.

45세경에 대학장구(大學章句)의 초고를 썼고 이동(李侗)의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의 영향 아래 격물(格物) 치지(致知)에 대한 연구가, 즉물 치지의 의미로 정리된 것이다.

46세 때 친구인 여조겸(呂祖謙)과 같이 ❰근사록(近思錄)❱을 편집하고 나서 여조겸의 권유로 육구연(陸九淵) 육구령(陸九齡) 형제와 연산(鉛山)의 아호사(鵝湖寺)에서 회합을 했다. 이것이 이른바 아호지회(鵝湖之會)인데 선생은 체인(體認)과 궁리(窮理)중시한다고 주장했으나 육구연은 양심(良心)에 대한 주체적 주장만 해 결론도 없이 헤어지게 되었다. 선생은 20여년간 출사(出仕)하지 않는 것은 南宋은 구세보민(救世補民)의 이상적인 실현은 부적합(不適合)하다고 생각했다.

49세에 장식과 여조겸 등 우인(友人)의 권유로 소명(召命)을 받아 남강군지사(南康軍知事)로 출사(出仕)했다. 이곳에서 향당의 자제들에게 인륜의 도(道)를 가르치고 충신 효자를 표창하며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재건하는 등 문치(文治)에 힘쓰는 한편 민정의 쇄신을 도모하여 휼민(恤民), 생부(省賦), 치군(治軍)에 관한정책을 중앙에 건의하기도 하였다. 52, 53세에 절강성(浙江省)의 기근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이때 구황을 위한 여러 정책과 사창(社倉)의 시행 황제(皇帝)의 입덕수정(立德修政)을 요구였다. 이러한 정책들은 중앙의 권신(權臣)에 거절되었으며 선생은 관직에 사임했다.

54, 55세에는 학문적 공방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육구연의 심학(心學)과 진량(陳亮)의 공리주의(功利主義)에 대한 논박이 전개되었다. 57세에 역학계몽(易學啓蒙)을 편찬을 통해 얻은 이선기후(理先氣後)의 사상을 정립하였으며 육구연과 태극논변(太極論辯)을 통하여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을 무형이유리(無形而有里)로 해석해 자신의 이기론보다 엄밀하게 재편했다.

60세 때 나라의 부름을 받아들여 장주지사(漳州知事)에 부임했으나 여기서도 남강군지사 때와 마찬가지로 교육(敎育)의 진흥, 풍속의 쇄신 인륜(人倫)의 진작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민생(民生)의 안정을 도모했는데 특히 민생안정의 구체적 정책으로 경계안(經界案)을 제시했다.

경계안은 호족(豪族)이 은닉한 토지를 색출, 조세함으로서 농민의 조세부담을 경감 시켜주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중앙고급관료들과 지방 호족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쳐 실시하지 못했고, 선생은 62세에 장자(長子)의 사망을 이유로 사임했다. 장주지사 시절은 그에게 있어 제자가 가장 많았던 시기였으며, ❮태극해이❯의 출간, ❮대학장구❯❮중용장구❯의 완성 등을 계기로 제자들과 理氣, 太極, 陰陽, 문제에 대한 왕성한 토론을 벌인 시기이기도 했다.

63세 때 건양의 고정(考亭)에서 강학에 열중하였던 선생은 64세에 담주지사에 부임했고 65세에 동료(洞獠)의 亂을 진압하기 위해 호남성 장사(長沙)로 부임했다. 亂을 진압한 뒤 영종(寧宗)의 즉위를 계기로 환장각대제 겸 시강(煥章閣待制兼侍講)에 임명되었다. 이것은 선생의 처음으로 중앙관직에 진출했다. 영종(寧宗)에게 주로 대학(大學)을 강의 하면서 권신(權臣)의 사리사욕에 대해서도 질타를 서슴치 않았다. 이러한 행동으로 당시 실권자인 한탁주(韓侂冑)의 분노를 사게 되어 마침내 46일 만에 시강의 자리에서 파면되었다. 파면된 뒤 강서성 옥산(玉山)에서 강의한 후 고정(考亭)으로 귀향했다.

66세(1195) 때에 선생을 시강(侍講)에 천거한 조여우(趙汝愚)와 한탁주와의 당쟁이 격화되고 그 결과 한탁주(韓伲冑)가 승리함으로써 조여우는 유배당했다. 한탁주는 계속 도학(道學)을 위학(僞學)으로 규정하고 朱子를 그 괴수로 지목해 탄압했다. 선생의 저서는 배포를 금지하고 제자 수십이 화를 당했는데 이것이 경원(慶元)의 黨禍(당화)였다. 그 다음해에 낙직파사(落職罷士) 당하였으며 71세(1200년) 타계했다. 시강직에서 파면된 뒤 죽기까지 몇 년간은 선생의 일생에 가장 불행한 시기였다. 그러나 선생은 학문의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아 제자들과 강론을 계속했으며 한문고이(漢文考異), 초사집주(楚辭集註),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등을 완성하기도 했으며 선이후기(先理後氣)현상을 이기혼재(理氣混在)라는 결론을 확정했다.

선생은 경세론 사상(思想)의 이론적 근거로서 경학(經學), 개인과 사회, 국가의 이상태(理想態)를 설정하기 위한 연구로 사학(史學)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구성되어 있다. 공맹사상(孔孟思想)도 재정립해 사상을 그대로 보전하면서 더욱 체계적으로 정리해 비약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중국사상사(中國思想史)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으며 宋, 元, 明, 代에 걸쳐 관학(官學)으로 독보적인 지위를 확보했다.

우리나라도 고려 말엽 안 향(安 珦 1243-1306). 백이정(白頤正 1260~1340), 이제현(李齊賢1287~1367), 이 색(李 穡 1328~1396)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은 조선건국과 함께 국가의 이념으로 받아드린 이후 실학, 개화사상이 등장한 이후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유지해왔다. 숭유억불(崇儒抑佛)은 초기 과거시험에 성리학의 종목이 있어 젊은 청년들이 공맹사상과 성리학을 탐독하여 불교문화는 점점 쇠퇴(衰退)하게 되었다.

南宋에서 1227년 태사(太師)로 추증되고 신국공(信國公)에 추봉(追封)되었다. 1241년 휘국공(徽國公)으로 추봉되어 공자묘(孔子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었다. 저서(著書)로 《대학장구》, 《대학혹문 大學或文》, 《중용장구》, 《중용혹문》 등이 있다. 후세학자들이 모아 기록한 朱子의 서적 중 중요한 것으로는 《주자대전집 朱子大全集》, 《주자전서 朱子全書》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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